1. 보게 된 이유
책 등에 적힌 제목의 이브 생 로랑이 제가 알고 있는 이브 생 로랑이 맞는지 궁금했습니다. 책을 꺼냈을 때 제목에 적힌 Letters à Yves와 사진, 그리고 그 밑에 적힌 Pirre Bergé 를 발견했습니다. 사진을 통해 제가 알고 있는 명품 브랜드의 이브 생 로랑인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밑의 피에르 베르제라는 이름은 전공시간에 잠깐 스쳐갔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책 뒷면에 적힌 구절 때문에 곧장 대여를 해버렸습니다.
“이 글이 너의 재능, 너의 취향, 너의 명민함, 너의 다정함, 너의 부드러움, 너의 힘, 너의 용기, 너의 순수함, 너의 아름다움, 너의 시선, 너의 청렴함, 너의 정직성, 너의 고집과 욕구를 보여주기를. 너를 걸을 수 없게 했던 그 거인의 날개를”
피에르 베르제, 제가 알고 있는 정보는 이브 생 로랑의 동성 연인이었으며 프랑스 신문사인 ‘르 몽드’를 인수함으로써 파산을 막은 대주주였고 신문사의 완전 독립권을 명문화한 사회 운동가였습니다. 연인, 이 세상에서 가족을 제외하고 나를 가장 사랑하고 생각해 줄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브 생 로랑의 리즈 시절부터 삶에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까지의 시간과 연인이라는 이름이 주는 감정이 묻은 글은 고작 몇 줄의 활자도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아직 사랑이라는 것은 잘 모르는 나이고, 그럴 듯한 그리움과 후회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궁금했습니다. 어떤 시간과 감정이 오가면 공장에서 프린트 됐을 이 단어의 나열들도 무거울 수 있는 걸까. 그들의 시간과 사랑이 궁금해서 책을 펼쳤습니다.
2. 겨울에 읽으면 더 좋을 책
저는 이 책을 종종 펼쳐보는데 역시 이 책은 겨울에 읽어야 더 문장들이 와닿는 것 같습니다. 보통 사계절을 봄은 생명이 잉태하고, 여름은 만개하여, 가을은 차곡차곡 정리를 하고, 겨울은 기다림으로 묘사합니다. 기다림에는 여러 감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후회일 수도 있고, 그리움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고 그 전부일 수도 있고.
이브 생 로랑이 세상을 떠나고 약 6개월 후인 12월 25일에 첫 편지가 시작됩니다. 가장 로맨틱한 날이라고 하는 그 시간에 사별한 연인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은 어땠을까 상상해 보니 편지의 활자들을 더 꼼꼼히 읽게 됐습니다. 대충 읽으면 안될 것 같았거든요.
피에르는 매일은 아니지만 그가 생각이 날 때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에게 편지를 씁니다. 편지가 긴 날도, 짧은 날도 있었지만 가벼운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가장 짧았던 편지는 2009년 3월 2일의 편지였습니다.
‘헤이, 네가 너무도 보고 싶어.’
정말 짧은 한 마디였고, 말로 하면 5초도 되지 않을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이 가늠이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그냥’이라는 말에는 많은 말이 함축되어 있다고들 하잖아요. 상대를 배려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아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내 감정을 숨기는 걸 수도 있고 여러 개의 단어를 축약해서 말하는 ‘그냥’은 정말 ‘그냥’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마법의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단어가 생각난 이유는 ‘보고 싶다’라는 그 말에 감히 추측도 할 수 없을 만한 피에르의 시간과 언어와 그런 것들이 담겨 있었다는 것이 느껴져서였습니다.
편지는 어느 날은 추억을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아파하기도 합니다. 누구보다 완벽했고 찬란하게 빛나던 연인이 그 날개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조금씩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피에르, 오랜 연인의 유언을 세상에 홀로 남아 묵묵히 수행하는 피에르, 그런 피에르의 후회와 그리움과 원망, 사랑 그리고 다시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편지는 계속 겨울에 머물러 있는 듯했습니다..
피에르가 편지를 썼던 목표는 이브와 피에르의 삶을 결산하는 것, 그들의 삶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저는 그들의 삶을 생생히 알 수 있었습니다. ‘결산’은 잘 모르겠습니다. ‘결산하다’의 뜻은 ‘일정한 기간 동안의 활동이나 업적을 모아 정리하거나 마무리하다.’인데 피에르의 마지막 편지에는 결산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 편지를 쓰면서 고통이 누그러지거나 멀어지지도 않아서 관두리라 하는 말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뚜렷이 알 수 있었습니다. 갖은 감정들이 그에게 뒤섞여 있어도 결국 피에르는 아직까지 이브를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행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3. 최종 리뷰
비가 오면 더 춥고, 바람이 오면 살이 에일 듯한 겨울에 꾹꾹 눌러 담은 편지를 읽으니 뺨에 홍조가 올라왔습니다. 흥분을 한 게 아니라 감정이 격해지면 더워진다고 하잖아요, 너무 울면 덥다고 하는 것처럼. 연인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 또는 전하고 싶었던 말들,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긴 이브를 놓아주려는 노력, 정리하려는 의지,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을 읽다 보면 그 감정에 동화되어서 무척 힘이 들기도 합니다.
한 번 사는 인생, 이토록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로 아름답게 사랑만 한 것은 아니었고, 알리제 전쟁과 마약, 욕구가 이브를 좀 먹어갔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서로는 소울 메이트이자 다시없을 사랑인 건 맞으니까.
이 말이 이 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한 겨울에 내 마음에 알 수 없는 감정을 가득 채운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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